서울형 한국미래도시 재개발 시범사업 도입 제안서 전통을 보존하는 도시에서, 전통을 발전시키는 도시로 1. 제안 배경 서울은 오랜 역사와 현대적인 도시기능이 공존하는 몇 안 되는 세계적 도시다. 그런데 정작 서울에서 진행되는 재개발·재건축 사업 대부분은 노후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주택을 공급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이 끝나고 나면 강남이든 강북이든, 신도시든 구도심이든 비슷한 얼굴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일이 반복된다. 물론 아파트와 고층건축물이 서울의 주거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제는 단순히 건축물의 수를 늘리는 단계를 넘어, 서울만이 가질 수 있는 도시공간과 정체성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마침 서울시는 신속통합기획을 통해 수변공간, 녹지, 보행공간, 스카이라인 같은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계획하고 있고, 실제 정비사업 곳곳에도 이런 요소가 반영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시도들이 개별 사업의 경관 개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를 한국의 전통적인 공간구조와 현대 건축기술을 결합한 하나의 도시 디자인 원칙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이에 재개발·재건축이 예정된 지역 가운데 한 곳을 골라 '서울형 한국미래도시 시범지구'를 조성할 것을 제안한다. 2. 정책 목표 이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과거의 한국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을 설계하는 것이다. 한옥을 대량으로 짓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건축의 외형을 그대로 베끼는 대신, 한국 전통공간이 가진 핵심적인 특징을 오늘의 방식으로 다시 읽어내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마당은 현대적인 중정이나 광장으로, 골목은 보행 중심 생활가로로, 처마는 차양과 입면 디자인으로, 전통정원은 도시 생태공원으로, 누정은 전망대나 문화공간으로, 수변마을은 수변 생활문화공간으로, 그리고 한옥은 현대건축과 결합한 한국형 건축으로 옮겨 생각해볼 수 있다. 목표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현대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3. 핵심 제안 재개발 지역 1곳을 '한국미래도시 시범지구'로 선정한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재개발·재건축 지역 가운데 사업 여건, 역사·자연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 곳을 고른다. 처음부터 서울 전역에 적용하기보다는, 하나의 시범사업으로 먼저 효과와 문제점을 확인한 뒤 평가 결과에 따라 다른 정비사업으로 단계적으로 넓혀가는 편이 현실적이다. 건축물 자체보다 공간의 연결을 우선한다. 지금까지의 개발은 대체로 도로에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면 담장이 가로막고, 그 담장 밖에 상가가 늘어서는 식이었다. 단지 안과 밖이 사실상 단절된 구조다. 시범지구에서는 이 흐름을 바꿔, 산과 하천에서 시작해 녹지축과 수변공원을 지나 보행가로, 전통정원과 광장, 상업·문화시설을 거쳐 주거공간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된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재개발 과정에서 생기는 공원과 공개공지들을 서로 이어 붙이면, 개별 단지 단위가 아니라 도시 단위의 녹지·보행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 4. 한국 전통공간의 현대적 재해석 마당. 건축물 사이 공간을 단순한 잔디밭으로 남겨두지 않고, 주민들이 실제로 머물 수 있는 현대적 마당으로 만든다. 주민광장, 작은 공연장, 휴식공간, 전통정원, 어린이 공간, 지역 행사 공간 등으로 채울 수 있다. 골목. 자동차 중심 도로 대신 사람이 걷고 머물 수 있는 생활가로를 만든다. 건물 1층에 상점과 카페, 공공시설을 배치해 거리의 활력을 살린다. 처마. 전통 처마가 해오던 역할, 즉 햇빛과 빗물을 막고 보행자를 보호하면서 건물 입면을 정리하는 기능을 현대적인 차양 시스템으로 되살린다. 전통정원. 조경시설 하나로 취급하지 않고, 산·물·돌·나무를 활용해 건축물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는 공간으로 설계한다. 5. 현대건축과 전통의 결합 이 정책은 서울을 통째로 한옥 도시로 바꾸자는 게 아니다. 고층 공동주택이나 업무시설 같은 현대적 건축물은 그대로 두되, 목재와 석재, 전통적인 색채, 차양, 수직·수평 비례, 중정, 한국적 조경, 자연재료, 전통문양의 현대적 재해석 같은 요소들을 적용하자는 것이다. 정리하면, 건축기술은 21세기 수준을 유지하면서 도시공간의 정체성만 한국적으로 만드는 방향이다. 6. 수변공간을 도시의 중심으로 하천이나 수변공간이 있는 재개발 지역이라면, 그 공간을 단순한 조경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중심 생활공간으로 삼아야 한다. 서울시가 신속통합기획을 통해 수변공간과 녹지·보행을 잇는 사업을 이미 추진하고 있는 만큼, 기존 정책과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다. 수변에는 보행로와 자전거도로, 전통정원, 문화광장, 공연공간, 카페·상업시설, 주민 휴식공간 등을 배치한다. 목표는 강 옆에 공원이 있는 도시가 아니라, 강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도시를 만드는 데 있다. 7. 재개발 인센티브 제도와 연계 사업자에게 추가 비용을 일방적으로 떠안기는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서울시의 기존 도시계획 인센티브 체계와 연계하는 편이 낫다. 예컨대 공개공지 확대, 보행공간 확보, 녹지축 연결, 수변공간 접근성 개선, 전통공간의 현대적 재해석, 지역문화시설 확보, 건축물의 우수디자인 적용 같은 요소를 충족한 사업에 도시계획적 인센티브를 검토하는 식이다. 공공성을 높이는 개발에 개발사업 쪽에서도 합리적인 혜택을 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8. 지역별 특성 반영 모든 시범지구를 똑같은 틀로 찍어내지 않는다. 한강변이라면 수변문화도시, 산과 인접한 지역이라면 산림·전통정원도시, 역사문화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라면 역사문화도시, 산업유산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면 산업·문화융합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다. '한국적인 도시'라는 공통 원칙은 지키되, 그 원칙 아래에서 지역마다 서로 다른 모습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9. 기대효과 도시 정체성 측면에서는, 어느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고층건축물 중심 경관에서 벗어나 서울만의 도시 디자인 언어를 만들 수 있다. 관광 경쟁력 측면에서는, 궁궐이나 한옥마을 같은 특정 관광지에 갇혀 있던 한국적 경험을 일반 주거·상업·수변공간으로 넓힐 수 있다. 문화재를 보러 오는 관광이 아니라 서울의 일상적인 도시공간 자체를 경험하러 오는 관광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시민들의 정주 만족도 역시 높아질 수 있다. 녹지, 수변, 보행공간, 광장, 문화시설이 주거공간과 연결되면 단순히 집을 공급하는 수준을 넘어 생활환경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 지역경제 측면에서는 보행 중심 생활가로와 문화공간이 살아나면서 상권, 문화산업, 관광산업이 함께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전통적 공간문화와 현대 도시기술을 결합한 한국형 도시개발 모델로서, 다른 국내 도시나 해외 도시개발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0. 예상되는 문제와 대응 사업비 증가. 전통적 재료와 특수한 조경·건축설계는 비용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전통건축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현대적인 재료와 공법으로 재해석하고, 공공성이 높은 부분에 한해서만 인센티브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사업성 저하. 공원과 광장, 보행공간이 늘어나면 개발 가능 면적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공개공지·녹지·보행공간을 도시계획 인센티브와 연계해 사업성을 보완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한옥마을화'에 대한 우려. 전통건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히려 현대적인 도시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한옥을 모든 건축물의 기본 형태로 강제하지 않고, 현대건축과 전통적 공간원리를 결합하는 선에서 조절할 필요가 있다. 지역마다 비슷해질 가능성. 한국적 디자인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면 또 다른 형태의 획일화가 될 수 있다. 공통 디자인 원칙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디자인은 지역별 자연·역사·산업·생활문화에 맞게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11. 추진 단계 먼저 서울시, 건축가, 도시계획가, 조경가, 역사·문화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연구를 통해 '서울형 한국미래도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다. 다음으로 정비사업 추진지역 중 자연환경·역사성·사업성 등을 종합 평가해 시범지구 한 곳을 선정한다. 이후 주민설명회와 시민공론장을 통해 주민들이 원하는 공간을 실제 계획에 반영하는 과정을 거친다. 정비계획, 건축, 조경, 교통계획을 통합해 시범지구를 설계하고 사업을 추진한다. 완공 후에는 주민 만족도, 보행량, 녹지 이용률, 지역 상권 변화, 관광객 증가, 부동산 가치 변화, 유지관리비 등을 분석해 성과를 평가한다. 그 결과가 확인되면 다른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간다. 12. 결론 서울의 미래는 더 높고 더 많은 건축물을 짓는다고 해서 저절로 결정되지 않는다. 서울은 이미 세계적인 현대도시이면서 동시에 600년이 넘는 역사와 고유한 자연환경, 전통적인 공간문화를 가진 도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재개발은 과거를 지우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세우는 과정이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공간문화와 미래의 기술을 잇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 제안은 서울을 예전의 한옥도시로 되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한국의 전통을 지금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해서,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서울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다. 서울시가 이미 추진하고 있는 신속통합기획, 그리고 도시경관 개선 정책을 바탕으로 '서울형 한국미래도시 재개발 시범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전통을 보존하는 서울에서, 전통으로 미래를 만드는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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